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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한겨레] 말기 암환자의 7000㎞ 자전거 대장정

2013년 2월 8일 한겨레




폐암 시한부 선고받고 국토종단 결심
파주~제주 184일 여행기 엮은 유고집
‘희망의 속도 15㎞/h’ 잔잔한 울림 줘


2012년 5월1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바람의 언덕’에서 한 남자가 담담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앞으로 10월31일까지 세 번의 계절을 지나 180여일 동안 대한민국 국토를 종단하며 펼칠 자전거 여행의 출발이었다. 제주도 한라산까지 가는 이 여행의 누적 주행 거리만 해도 7000㎞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이 도전은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도전하는 남자, 김선욱(당시 60살)씨는 수술조차 불가능하다고 하는 폐암 4기의 암 환우였다. 2010년 청천벽력처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김씨는 부인 박재란(59)씨의 권유에 힘입어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충만한 삶’과 ‘진짜 사랑’을 누렸다.


<희망의 속도 15㎞/h>는 이 길고도 짧은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프리랜서 작가인 이진경씨가 김씨 부부와 함께하며 담아낸 ‘여행기’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끝낸 김선욱씨는 책 출간을 앞둔 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뜻하지 않게 이 책은 김씨의 유고가 된 셈이다. 하지만 여행 당시의 시점으로 기록된 책장 속에선 생생한 그의 삶과 희망이 묻어난다.


젊은 시절 무역업으로 승승장구하기도 했던 김씨는 1980년대에 사업에 큰 위기를 겪은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갔다. 현지에 정착한 삶 속에서 그는 ‘재미 이론’을 깨쳤다고 한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할 것이 아니라, 지금을 충분히 누리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문에 스포츠와 여행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200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오랫동안 병치레했던 전남편을 떠나보낸 뒤 혼자 지내던 박씨를 만났다. 서로 많이 달랐지만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을 할 정도로 서로 끌렸고 행복한 신혼을 보냈다.


그러나 2010년 11월 김씨는 갑작스런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던 김씨였기에 절망 또한 깊었다. 이런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내 박씨였다. “은퇴 뒤에 떠나고자 했던 자전거 여행, 지금 가보면 어떨까” 하는 박씨의 제안에 김씨는 다시 ‘오늘’을 살기로 결심했고, 무모할 것 같은 자전거 국토 종단 여행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하루에 여섯 시간 동안 50㎞를 달리는 자전거 여행 속에서 김씨는 그 누구보다도 ‘충만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제나 변함없이 식사와 간식, 그리고 키스로 남편의 라이딩을 응원하는 아내 박재란씨와의 사랑, 구간마다 김씨와 함께 호흡하며 달렸던 수많은 동반 라이더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지금, 여기의 소중함’이라는 말은 여기저기서 많이 접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삶의 위기를 다시 삶으로 치유해내려 한 김씨의 마지막 여행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 말에 절실한 의미를 담아낸다. 또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언제나 희망이라는 사실도 다시금 깨우친다.

 최원형 기자circle@hani.co.kr


[문화] 말기 암환자의 7000㎞ 자전거 대장정

한겨레, 2013년 2월 8일 [원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