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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SBS] 8시뉴스 취재파일 선생님, 당신은 희망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2013년 1월 13일 SBS 뉴스 취재파일




  저희들은 보통 일 년에 백건 안팎의 방송 뉴스를 만듭니다. 바쁜 곳은 더 하기도 하고 심층뉴스를 만드는 데 집중하면 줄어듭니다. 백 건 안팎의 뉴스를 만들다보면 매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을 곳을 다니게 됩니다. 다들 소중한 분이고 기억에 남는 장소지만 지난해 1년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시속 15km 전국일주, 희망을 던진 말기암 환자.

  지난해 5월 한 말기암 환자를 취재했습니다. 2010년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김선욱 선생님입니다. 1년간 항암치료를 받다가 병상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자신이 싫어서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모두가 말렸지만, 확고했습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출발해 제주도까지 6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는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김 선생님을 만난 때는 전국일주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입니다. 꽃샘추위도 끝나고 나른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 즈음이었습니다. 말기암 환자를 취재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 첫 만남부터 살짝 긴장했던 터였습니다. 경기도 양평의 한 청국장 집에서 만났는데, 좀 놀랐습니다. 환자라는 기색은 어디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지, 밥을 먹은 뒤 먹는 약 종류가 유달리 많다는 게 치료를 받고 계신 분이라고 짐작하게끔 만들 뿐이었습니다.

  체력도 대단했습니다. 인터뷰를 좀 현장감 있게 해보겠다며 집에 묵혀둔 자전거를 취재차량에 싣고 가서 같이 달리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라는 게 방송에는 겨우 1~20초 나가고 말지만, 실제는 10배는 더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날은 더 길어져 30분가량을 같이 달리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질문을 하는 제 숨이 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숨소리는 별 변함이 없었습니다. 암 환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6~8시간을 달리고 저녁에는 텐트에서 야외취침을 했던 터라 저녁에는 김 선생님과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우면서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기사에 넣어야 할 사연을 취재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인터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이야기는 제 목적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 분이 아닌 제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분은 제 삶을 듣고 이해해주시면서 조언을 하고 계셨습니다. 기자가 다른 사람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아니라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일종의 태업이고, 방임이었지만,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일주를 끝내시는 날 꼭 함께하겠다고.
[해당 리포트 영상보기]

  뉴스가 나간 뒤 곧바로 제 책상 위 달력엔 빨간 동그라미가 하나 추가됐습니다. 10월 31일 김 선생님이 제주도에서 자전거 일주를 완주하는 날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틈 날 때마다 동정을 알려주셨고, 먼발치에서 계속 응원을 보내드렸습니다. 제주도에서 완주 기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주 일정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변명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완주 이틀 전까지 일정을 맞춰보려다 결국 못 가게 됐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해하신다는 말씀은 주셨지만, 휴대전화 너머로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6개월간 전국일주를 하시면서 암세포가 줄었다는 소식과 건강하게 제주도 일정까지 마무리한 소식을 후배 기자의 뉴스로 만나면서 고마웠습니다.
[해당 리포트 영상보기]

전국일주를 끝낸 선생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본, 중국, 미국 일주를 꿈꾸시면서 산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SNS로 보내주셨습니다. 말기 암환자의 평균 생존 기간을 훌쩍 넘기신 데다 암 세포까지 줄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터라 다음 도전도 함께 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유별났던 한파 속에서도 꿋꿋이 다음 도전을 준비하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스스로를 또 반성했습니다. 지난달 30일 하얗게 눈이 쌓인 등산로를 오르는 사진을 올리시며 새롭게 다짐하는 글도 반갑게 읽었습니다. 응원의 댓글을 달아드리며 내년을 기약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댓글을 달아도 더 이상 답글이 남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10일 폐암이 악화돼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보다 강인했던 체력도 불굴의 의지도 끝내 암을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너무나 건강한 모습만을 봐왔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또 다시 시작해야 할 도전들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데 떠나야하는 선생님의 원통한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전 남편과도 사별했던 사모님의 억울한 마음도 생각났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떠나신 분에게 죄송한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지만, 이렇게 글로 변명하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도전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또 많은 분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어렵게 밟아놓은 길은 누군가가 반드시 뒤따라가 더 멀리 이어갈 것이라 믿습니다. 선생님 고이 잠드세요.  

권영인 기자



 [취재파일] 선생님, 당신은 희망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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